[책이 있는 창가] 심현섭, 수필가

일본과 일본인을 아무리 미워한다고 해도 단 한 사람 미워할 수 없는 일본인이 있다.

그는 일찍이 이와 같이 말했다.

“조선 사람들이여, 비록 내 나라의 모든 지식인들이 당신네를 욕하고 또 당신네를 괴롭히는 일이 있더라도 그들 가운데에는 이 글을 쓴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기 바란다.
... 우리나라가 올바른 인도를 걷고 있지 않다는 분명한 반성이 우리들 사이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기 바란다.“ (1919년 5월 11일)

그의 이름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이다. 그의 말대로 그가 홀로 한 사람, 일본인 중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오늘 일본인을 미워해서는 안 될 것이다.

11월 중순 겨울답지 않게 따사로운 한 낮, 굴러가는 노란 낙엽을 밟으며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동아일보 사옥에 있는 일민미술관을 찾았다. 문화적 기억 「야나기 무네요시가 발견한 조선 그리고 일본」이라는 긴 이름의 특별전을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관람을 끝내고 막 나서려는 데 문 앞에 단정하게 서 있는 친구를 만났다. 캐나다로 이민 갔다는 말을 듣고 이젠 못 만나는 줄 알았는데 하면서 반긴다. 이 친구가 누구인가. 현재는 명지대 교수를 하는 ‘윤용이’ 인데 먼 옛날 나에게 야나기 무네요시를 소개하면서 그의 저서 「조선의 예술」이란 책을 사준 친구이다. 이런 일을 두고 세상에 ‘우연’이 없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힘이 서로를 한 장소에 있도록 작용한 것이다.

야나기는 끔찍이도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조선이, 조선인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에 끌리어 정애(情
愛)를 갖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고 한다.

“오직 나는 조선 사람들이 산출한 미의 세계에 한없는 정애와 존경심을 갖는 한 사람일 뿐이다. 내가 40여 년 전에 몇 번 조선에 건너갔을 때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 여러 가지 좋지 못한 감정이 있었다. 그 큰 원인은 조선에 대한 존경심 부족에 인하는 것이라고 생각 되었다. 그러나 미의 창을 통하여 바라볼 때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나라였다.

오직 감탄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조선의 예술> 개정판 머리말에서 1954년

그는 원래 도쿄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종교철학을 전공한 사람으로 미술 전문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전문가가 아닌 심미안으로 민중들이 창조해낸 예술에 심취하면서 그를 따를 수 없는 전문가로 만들었다. 특히 투박하고 단순하면서도 실용성이 강한 서민들의 실용품에서 미적 감각을 발견하고 이를 <민예(民藝)>라는 말로 정의 하였다.

그가 조선을 처음 여행한 것은 그의 나이 27세 때인 1916년이었다. 밥그릇 하나, 물그릇 하나, 마구간의 여물통까지 조선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한 사람이 야나기였다. 조선인들이 예사롭게 여기는 일상생활 속에 그는 장인들의 멋을 감지할 수 있었다. 조선의 미를 새롭게 정의하고 가슴으로 읽을 수 있었던 넉넉한 품의 미학자를 만난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무엇보다 조선인들이 자신들이 만들어낸 고유의 물품이 얼마나 소중하고 우수한 것인지 자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많은 것들이 일본풍으로 바뀌어가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고 일부에서는 조선의 것을 무시하고 소멸시켜나가는 것이 훗날 큰 죄악이 되리라고 외쳤다.

1921년, 조선총독부는 경복궁의 일부를 부수고 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해체를 발표했다. 남의 나라에 들어가서 그 나라 왕궁을 강제로 파괴하고 자신들의 통치기관인 총독부 건물을 일방적으로 지은 예가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몇 년 전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 무리가 거대한 석상을 파괴한 것보다도 더 야만적인 일이었다.

야나기는 1922년 <잃어지려 하는 한 조선 건축을 위하여>라

는 제목으로 피를 토하듯 이를 성토하고 언론에 공개하였다.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너의 목숨이 이제 경각에 달려 있다. 네가 일찍이 이 세상에 있었다는 기억이 차가운 망각 속에 묻혀 버리려 하고 있다.

어쩌면 좋단 말이냐. 내 마음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무자비한 끌과 매정한 망치가 너의 몸을 조금씩 파괴하기 시작할 날이 이제는 멀지 않게 되었다.
... 너를 낳은 너의 친근한 민족은 지금 언론의 자유를 잃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대신해서 너를 사랑하고 아끼는 자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생전의 너에게 알리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말들을 적어서 공중 앞에 내보내는 것이다.“

광화문은 완전 소멸의 위기에서 벗어나 오늘날 경복궁 민속박물관 정문으로 옮겨졌다가 후에 다시 제 자리에 복원되었다. 이때 야나기의 나이 33세의 젊은이였다. 이로부터 일본 정부에서 불온분자로 지목하여 계속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야나기의 아내 카네코도 성악가로서 조선에 대한 정애가 도타워 사라져가는 조선 미술을 한데 모아 미술관을 건립하기 위해 모금의 일환으로 일본과 조선 각지를 돌며 음악회를 열었다. 마침내 1924년 경복궁에 <조선민족미술관>이 건립되었다.

자신이 가진 예술의 가치에 대해 미처 알지 못하고 있는 동안 오직 외세의 핍박에 고통 받고 있던 식민 탄압의 시기에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와 격려하고 위로의 말을 전한 사람이 야나기였다. 비록 지금 식민지 상태이나 당신들이 가진 예술은 내가 보기에 대단한 것이고 결국 당신들이 악을 이기고 일어설 날이 반드시 온다고 힘을 더해 주었다.

“생명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시인은 읊고 있다. 그러나 예술에 나타난 조선의 생명이야말로 무한하고 또한 절대적이다. 거기에는 깊은 미가 있다. 미 그 자체의 깊이가 있다. 조용하게 안으로 안으로 파고드는 신비로운 마음이 있다. 조선은 비록 바깥으로는 약하더라도, 그 예술에 있어서 안으로 강한 나라이다.”

한국 정부는 1986년 외국인 최초로 그에게 문화훈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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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밴쿠버 중앙일보 2006년 12월 9일(토), A10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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